셰르파 요가

SHERPA MAGAZINE · 제1호

인문·철학

빠른 길 대신 그늘길

벗셰르파 편집부· 2026.09.04

같은 목적지까지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0.9킬로미터에 13분, 다른 하나는 1.3킬로미터에 18분.

올여름 많은 사람이 두 번째를 골랐습니다. 더 멀고 더 오래 걸리는 길을요. 그쪽에 그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주 만에 만든 지도

「그늘로: 뚜벅의 여름길」은 올해 7월에 나왔습니다. 만든 사람은 서울대 수학교육과에 다니는 유민준 씨.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준비하던 스물세 살 대학생입니다.

개발 기간은 2주였습니다. 공공데이터로 공개된 건물 높이와 도로 지형, 버스 운행 경로 같은 정보를 모아 태양의 고도와 그림자를 계산했습니다. 새로 수집한 데이터는 없습니다. 이미 공개되어 있던 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꺼내 본 것입니다.

앱은 걷는 경로만 안내하지 않습니다. 버스를 탈 때 어느 쪽 창가가 그늘질지까지 알려줍니다. 개발자는 군 복무 시절 집과 부대를 오가는 버스에서 세 시간을 써야 했고, 햇볕을 피할 자리를 고르던 경험이 그 기능으로 이어졌다고 말했습니다.

만든 계기도 거창하지 않습니다.

너무 더워서 자주 가던 산책길조차 걷기 힘들 지경이 됐을 때 앱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게 됐다.

8월 폭염 속에서 이 앱은 앱스토어 다운로드 1위에 올랐고, 누적 이동 경로가 50만 건을 넘었습니다.

기본값이 바뀐다는 것

오랫동안 지도 앱의 기본값은 '가장 빠른 길'이었습니다. 그게 당연해서 우리는 지도가 무엇을 기준으로 길을 골라주는지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올여름 수십만 번의 선택이 다른 질문을 했습니다. 빨리 가는 것보다 덜 뜨겁게 가는 것이 중요해졌습니다. 기후가 바꾸어 놓은 것은 기온 숫자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좋은 길이라고 부르는지까지 바꿔 놓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앱은 편리한 도구이기 이전에 기록이기도 합니다. 2026년 여름, 사람들이 어떤 길을 찾고 있었는지에 대한 기록입니다.

청사포에서도

수련을 오가는 길을 떠올렸습니다. 바닷길은 선선할 때는 가장 좋은 길이지만 한낮에는 가장 가혹한 길입니다. 그늘이 없으니까요. 올여름에는 건물 사이로 돌아서 오시는 분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다만 모두가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약속 시간이 빠듯하거나 길 위에서 일하는 사람은 그늘을 고를 여유가 없습니다. 그늘길 앱이 반가운 만큼, 그늘을 고를 수 없는 사람들의 여름도 같이 보게 됩니다.

있는 것으로 만들기

이 이야기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건 기술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자기 불편을 그냥 참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만 쓰고 말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새로 생긴 것은 없습니다. 태양도 건물도 가로수도 원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다만 그것들을 이어서 보는 사람이 없었을 뿐입니다.

오늘 걷는 길에서, 어느 쪽에 그늘이 져 있는지 한번 보시면 어떨까요.

함께 읽으면 좋은 책

『2050 거주불능 지구』 — 데이비드 월러스 웰즈 (추수밭,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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